수많은 물품의 수출입을 관할하는 세관은 우리나라의 대문이라 할 수 있죠. 세관은 서울, 인천, 광주, 대구, 부산 총 5곳의 본부세관을 비롯, 총 34곳이 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저의 고장이자 제1의 항구도시, 부산세관의 역사가 궁금해졌습니다. 부산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국 근현대사 아닐까요? 6.25전쟁이 터지고 수많은 피란민들이 몰리고, 임시수도가 된 부산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이 역사의 이름으로 기록되었으니까요. 세계와 맞닿아 있는 항구의 푸른 물이 출렁이는 부산세관, 격동의 시기에 부산과 함께 자란 부산 세관의 역사를 근현대사 속에서 알아봅시다.
부산 세관의 전경
1. 1800년대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1876년 2월, 부산항이 개항합니다. 2년 뒤인 1878년 9월에 근대 세관 역사의 시발점인 두모진 해관이 설치됩니다. 또한 이 해에 부산에 일본 제일 은행 부산지점이 설치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두모진 해관은 그해 12월에 폐쇄되고, 5년 뒤인 1883년 11월에 드디어 부산해관이 설치됩니다. 이 부산해관이 바로 근대 부산세관의 전신입니다.
1883년 우리나라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바로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가 발간됩니다. 화폐를 발행하는 전환국이 설치되고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사립학교인 원산학사도 이 때 세워집니다. 많은 것들이 처음 생겨난 시기이군요. 수많은 ‘최초’들 사이에 부산세관도 자리잡습니다.
부산본부세관에 있는 두모진해관의 종탑
2. 1900년대
1907년 12월에 부산 해관은 부산세관으로 개칭합니다. 그 해 대구에서는 서상돈이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300만원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 주권을 회복하고자 한 운동이죠. 헤이그 특사가 파견되기도 하였습니다. 고종 황제가 퇴위한 해이기도 하고요. 정미7조약으로 불리는 한일 신협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됩니다. 1907년은 굵직굵직한 사건이 많았군요.
헤이그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모습
사진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국채보상운동의 주창자 서상돈
사진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1910년은 슬픈 해죠. 부산세관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슬픈 해로 기록됩니다. 1910년 8월 29일,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인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0월에 부산세관은 조선총독부 소속이 됩니다.
긴 일제강점기가 지나고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땅에는 외세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1946년 2월 부산세관은미군정청 교통국 해관과 소속이 됩니다. 일본의 손아귀에서 드디어 벗어났는데 부산세관은 또 다시 다른 나라의 이름을 달게 되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2달 후 4월에 부산세관은 다시 재무부 소속 부산세관으로 환원됩니다.
1946년에는 제 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되고, 이승만이 남한에서 단독으로 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인 정읍발언으로 화제가 됩니다.
1948년은 대한민국이 역사에 발을 내딛는 순간입니다. 대한민국헌법이 공포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죠. 북한도 마찬가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합니다. 한 나라가 기지개를 켜는 이 시기에 부산세관은 정부수립과 동시에 재무부 세관국 소속이 됩니다.
1952년에는 부산세관 마산분관이 설치됩니다. 포항감시서를 출장소로 승격하고, 묵호세관을 부산세관 묵호출장소로 개편하지요. 1952년은 발췌개헌으로 불리는 제1차 개헌이 일어난 해입니다. 그리고 부산에서 정치파동이 일어난 해이기도 합니다. 발췌개헌은 1952년 7월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의 첫 번째 헌법개정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당 창당 후 재선을 위해 직선제로 헌법을 고쳐 강압적으로 통과시킨 개헌안이죠. 경찰과 군대가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기립투표방식으로 출석인원 166명 중 찬성 163, 기권 3으로 통과되었습니다.
이 발췌개헌에 따라 8월 5일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하고, 압도적인 지지로 이승만이 당선됩니다. 부산정치파동은 이승만 대통령이 개헌안 통과를 위해서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국회해산 위협, 국회의원 강제 억류, 백골단, 땃벌대 등 폭력단체에 의한 협박을 총동원한 사건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혼란의 시기입니다.
부산정치파동
사진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70년 8월에는 관세청이 발족됩니다. 70년은 새마을 운동이 제창되고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된 해입니다. 1980년은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해이죠. 그리고 KBS, 컬러TV가 처음으로 방송됩니다. 이 해 6월에 부산세관은 드디어 부산본부세관으로 승격되고, 김해와 제주세관을 관할하게 됩니다.
1988년에 노태우 정부가 성립되고, 제 24회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죠. 다음해인 1989년과 1991년에는 사상세관과 양산세관을 부산본부세관에서 관할하게 됩니다.
3. 2000년대
격동의 시기인 1900년대를 지나고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부산 세관은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2000년 7월에는 사상세관을 사상출장소로 전환하고, 2005년에는 부산세관 국제우편출장소와 홍보담당관실을 신설합니다. 그리고 사상 등 권역내 5개 세관출장소가 세관으로 승격되었네요. 2000년대의 부산세관은 여전히 성장중입니다.
2006년 1월에는 부산 신항이 개항되었고, 컨테이너를 열어보지 않고도 화물의 검사를 할 수 있는 최첨단 차량용 검색장비인 'ZBV'를 도입합니다.
ZBV의 모습
강화도 조약과 함께 부산항이 시작되고, 최초의 신문, 최초의 학교와 함께 등장한 부산세관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함께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근현대사 속에서 알아본 부산 세관의 역사, 어떠셨나요? 미래에 더해질 부산 세관의 역사는 또 어떨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