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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랑스 교류사를 통해 본 프랑스와의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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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누군가에게는 프랑스의 화려한 음식들이 떠오를지 모르겠습니다. 비옥한 땅에서 나온 농산물과 대서양, 지중해에서 잡은 해산물로 만들어낸 라타투이나 크루아상 같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음식들. 다른 누군가에는 에펠탑이나 베르사유 궁전 같은 화려한 프랑스의 건축물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프랑스는 아름다운 문화와 예술로도 많이 알려졌는데요. 프랑스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를 읽으며 슬픈 사랑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뒤마의 <삼총사>를 읽는 분들은 화려한 모험담을 보며 손에 땀을 쥐기도 할 겁니다.



사진1파리 에펠탑과 개선문



사진2프랑스의 마카롱 가게



우리나라에서 프랑스까지는 약 9,000km 정도 떨어져 있고 비행기로도 적어도 13시간 이상은 걸리는 아주 먼 곳입니다. 그런 프랑스와 우리나라가 올해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린 언제부터 프랑스란 나라를 알게 되었을까요. 이번엔 한국-프랑스 교류사를 살펴보며 궁금증을 풀어나가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한국과 프랑스의 첫 교류는 1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8세기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의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한국에 대한 지식을 가져다 처음 자국에 알린 것인데요. 이를 통해서 가톨릭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 한국에 파견됩니다. 아직은 여러 견해가 있지만, 현재로는 프랑스의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신부가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왔다고 알려졌습니다. 이렇게 들어온 프랑스 선교사들은 1839년 기해 사옥 때 조선의 가톨릭 억압 정책에 의해 모두 순교합니다.


사진3첩병인양요의 기록, 운현서
(출처=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모두 처형당하는 와중에 살아남은 리델 신부가 1866년 중국으로 피신한 후,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피에르 귀스타브 로즈 제독에게 선교사들의 순교 사실을 알리게 됩니다. 이에 프랑스 해군이 조선에 항의하고 피해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강화도를 침공하게 되는데요.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병인양요(1866)입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프랑스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첫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조선과 무력 충돌을 벌인 프랑스 해군은 외규장각 서고에 있던 고문서들과 은덩이 등을 약탈해갑니다. 


이후에 1886년 6월 4일 조선의 전권 대신 김만식과 프랑스의 전권대신 코고르당(F.G. Cogordan)이 만나 조·불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 조약에는 ‘천주교 선교의 자유와 주택이나 성당을 짓는 등의 일이 있는 경우 조선이 편의를 봐준다.’ 등의 내용이 담겨있는 만큼 조선에게는 불리한 조건의 조약이었습니다. 이후엔 파리에 대한제국공사관을 설치하게 되고 최초의 한국 외교관으로 민영익이 기용되기도 합니다.


이후 조선이 일제에 의해 점점 수탈되어 가면서 조선과 프랑스의 교류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해 조선이 외교권을 상실하게 되면서 조선과 프랑스 사이의 외교관계도 중단되게 됩니다. 이 시기에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취하는 노선을 선택하지만, 동시에 종교 분야와 철도 부설권, 광산 채굴권 등의 경제적인 이윤을 취하는 등 실용적이고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이어갑니다.



사진4중국 상하이에 프랑스 조계 내 보창로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청사
(이미지출처=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1910년 국권침탈로 인하여 조선 정부가 사라지자 프랑스는 상해 임시정부와 교류를 이어갑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임시정부는 김규식을 외무총장 겸 대한민국 주파리대표위원으로 임명하고 파리에 파리강화회의 한국민 대표관을 설치하여 한국의 처지와 독립운동을 알리게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프랑스의 도움으로 프랑스 조계에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타국임에도 프랑스 혁명의 정신 이념 중 하나인 박애(인종·종교·국적 등을 초월한 인간애)를 실천하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독립 이후프랑스 제4공화국 정부가 1949년 2월 15일 한국을 승인함에 따라 양국 간의 국교가 재개되었습니다. 후에 1949년 4월 주한 프랑스 공사관이 서울의 옛터에 개설되고 초대 공사 앙리 코스틸레스(Henri Costilès)가 임명됩니다. 

프랑스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도 우리나라에 도움을 주었는데요. 참전 16개국의 일원으로 구축함 1척, 지원부대 1대대, 연인원 3,421명 규모의 파병 병력을 한국에 파견합니다. 여기에 장교와 부사관을 포함해 269명이 전사하고 1,357명이 부상당합니다. 다시금 이들의 박애 정신이 마음을 울렸습니다. 이후 양국의 외교관계는 1958년 10월 대사급으로 승격됩니다.


오늘날 프랑스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현재 프랑스는 한국의 제5위 교역국이자 제4위 투자국입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을 계기로 양국 정상회담에서 ‘21세기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했습니다. 2010년 11월에는 니콜라 사르코지(Nicolas Sarkozy)대통령이 G20 서울 정상회의에 참석하였고,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이때 외규장각 도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합의하기도 했습니다. 



사진5한–EU FTA 무역위원회 개최 때의 모습
(출처=산업통상부)


무역에서는 현재 FTA가 타결된 상황입니다. 프랑스가 속해있는 EU와 우리나라는 2015년 FTA가 전체 발효된 상태입니다. 이를 통해서 프랑스산 와인이나 가방 등의 수입이 늘어나 소비자들의 후생이 늘어날 거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EU가 우리나라에 투자한 액수가 약 800억 달러(15년 2분기 기준 누적)나 되는 만큼 앞으로 이에 속해있는 프랑스와도 활발한 교류가 예상됩니다.



사진6 프랑스에서 입국 시 관세 면제 기준. 프랑스에 여행 갈 때 알아두면 좋겠죠 (출처=관세청)



멀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나라 프랑스. 비록 시작은 불편하고 불쾌한 사이었지만,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정다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함께해 온 시간이 어느덧 130년이나 된 지금, 지난 과거보다 앞으로 같이 갈 시간이 더 많이 남은 만큼 서로 뭉쳐 시너지 효과를 내는 그런 관계가 앞으로도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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