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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씌우는 한국산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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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일본 가고시마로 끌려온 조선도공 심수관가(沈壽官家)의 후손들이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는 유물 중에 탕건이 있다. 400년 전 조상들이 도자기를 구울 때 썼던 것으로 조선의 후예임을 말해 주는 상징물이기에 더욱 그 가치가 돋보인다. 과거 우리는 전통적으로 기능과 실용 위주의 모자를 써 왔다. 사내가 장가가면 상투를 틀고 상투 위에 망건, 망건 위에 탕건, 탕건 위에 갓을 썼다. 이처럼 모자 하나를 착용할 때마다 용도가 달랐다. 일터에서, 실내에서, 아니면 외출이냐에 따라 변신을 했던 것이다.

 

 

구한말 당시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모자는 외국여행자들로 하여금 더욱 흥미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1892년 우리나라를 찾은 샤를 루이바라는 후일 그가 쓴 '조선기행'에서 "조선에서 모자의 가짓수는 한 둘이 아닐뿐더러 그 중요성을 따지자면 다른 옷가지에 비할 게 아니다"라고 밝혔다.

1903년 조제프 드 라 네지에르도 '극동의 이미지'에서 "조선은 가장 독특한 모자 문화를 지닌 나라다. 모자에 관한 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문을 해주어도 될 수준이다"라고 극찬했다. 이 정도라면 조선은 모자의 나라요 모자의 종주국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전통모자는 대체로 추위에 약하다는 결점이 있다. 그래서일까. 18세기 중반 청.일간 직교역으로 조선의 중계무역이 어려워지자 조정에서는 공용은의 확보와 역관들의 무역이익을 보장해 주는 방안으로 1758년의 관모제(官帽制)와 1777년의 세모제(稅帽制)를 각각 시행하면서 중국산 모자를 대량 수입하게 됐다. 이 모자는 양털로 만든 방한용품으로서 당시 사대부 부유층이 주수요층이었다. 이러한 모자무역 실태를 직접 중국에서 눈으로 보고 온 박지원은 그의 '열하일기'에서 "모자를 만드는 법은 아주 쉬워서 양털만 있으면 우리도 만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양을 기르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은 해가 다 가도 고기 맛을 보지 못한다. 온 지역의 수백만명 이상이 모자 하나는 써야 겨울을 넘긴다"고 하면서 모자구입에 많은 은화가 소비되고 있다며 모자무역의 폐단에 대해 매섭게 지적했다.

개항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단발령 등으로 갓을 멀리하고 수입된 외국모자가 서서히 시장을 잠식했다. 특히 파나마모자와 맥고모자가 널리 착용됐다. 이 모자들은 남미의 에콰도르와 동남아의 인도차이나에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중절모자를 만들어서 유행을 시키기도 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부산 광복동과 남포동을 누비던 마카오신사들이 구색을 갖추기 위해 즐겨 찾았던 모자도 역시 파나마모자였다. 이렇게 외국산 모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의 전통 모자를 뒤엎고 기세를 올리고 있을 때 일찌감치 모자 종주국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기업이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랴.

지난 1959년 청계천 4가 개천가에서 모자 70개에 불과한 노점형태의 모자점에서 세계 최고의 모자기업으로 성장한 영안모자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이 회사는 해외에 연간 1억개 이상의 모자를 판매하며 세계 모자시장의 35% 이상을 점유한 세계 제일의 모자회사가 됐다. 그리고 홍진HJC는 세계시장에서 오토바이 헬멧의 대명사로 통한다. 이 회사도 40년 동안이나 한우물을 파면서 품질을 앞세워 20년째 세계시장에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반모자와 헬멧은 서로 기능은 다르지만 머리에 쓴다는 차원에서 보면 같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자산업은 모양과 품질에서 세계 으뜸이다. 모자의 나라, 한국산 모자가 세계 각국에 수출돼 이제는 지구를 씌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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