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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일무역의 중심지, 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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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방문한 부산세관박물관의 이용득 박물관장께서, 부산 무역의 역사는 ‘초량왜관’을 빼놓고서는 논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산 동구의 ‘초량동’이라는 명칭은 들어본 적 있지만, 왜관이라는 용어는 생소했는데요! 이 기회를 통해서 초량왜관을 비롯한 왜관의 기능과 역사적 의의를 파헤쳐 보았습니다.



왜관(倭館)이란?

조선시대 일본인과의 통상(通商)과 외교(外交)업무를 위해 조선 동래부에 설치한 공관(公館)을 말합니다.

 


왜관역사?

조선전기부터 일본은 조선에 오는 일이 많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경상도의 연해안을 주로 방문하였지만, 점차 그 범위가 넓어지면서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은 1407년부터 부산포내이포를 중심으로 일본인의 출입과 교역 품을 통제하기 시작하였으며, 한양에는 동평관을 설치하여 상경일본인들이 숙소로 이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1426년 염포를 추가함에 따라 ‘삼포제도’를 확립하게 됩니다. 이 3곳에 왜관을 설치함으로써 항거왜인(우리 나라에 상주하는 왜인)을 거주시킨 후, 도항왜인(배를 타고 오가는 왜인)의 접대와 교역을 허가하게 됩니다.

1544년, 다른 곳의 왜관은 모두 폐쇄되고부산포에만 단일 왜관을 설치하였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임시 폐쇄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몇 차례 장소를 옮긴 끝에 1678년 초량왜관이 신축되었습니다. 초량왜관은 1872년 메이지 정부에 점령될 때까지 일본과 조선 양국의 외교, 그리고 무역의 중심지로 존속되었고, 양국은 왜관에 관리를 파견하여 외교 및 무역 업무를 총괄하도록 하였습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공사관이 초량왜관에 설치되었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거주지와 교역은 더 이상 초량왜관에 한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관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조선전기의 왜관의 기능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거주와 사신의 숙박장소
대마도에서 건너온 건장한 사내 400~500명이 거주하는, 금녀의 공간이면서 사신들이 머무는 숙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② 교역의 장소
국가에서 필요한 공물을 매매하는 공무역뿐만 아니라 사무역을 하는 중계무역 장소였습니다.

 

③ 외교교섭의 장소
국서의 내용에 대한 수정과 왜인이 요구하는 사항을 예조에 전달하는 조처의 기능을 하였습니다.


④ 왜인통제의 장소
일본사신이 몰래 왜관 밖에 나가 밀무역을 하는 등의 불법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관리 감독하였습니다.


왜관무역은 조선의 해안가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일본에게 거주지를 제공함으로써 합법적인 교역의 대상으로 삼으며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통제와 감시를 통해 일본인들로 인한 폐해를 방지함으로써, 조선과 일본은 보다 안정적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초량왜관의 역사적 의의는?

초량왜관은 약 200년에 가깝게 조선시대 일본인들과의 교역을 위해 부산에 설치됐던 장소로, 사관(使館)과 상관(商館)의 기능을 담당하였습니다. 조선의 인삼, 중국의 생사, 일본의 은이 교역된 동북아 최대의 중계무역지로서의 부산은,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무역활동을 활발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래상인은 초량왜관을 근거지로 하여 더욱 왕성한 무역활동을 펼쳤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부산을 국방상의 요지로 만들었습니다만, 일본측의 끈질긴 화해요구와 함께 이러한 적대정책을 계속 펼치는 것은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동래 부산포에 초량왜관을 설치하여 일본인들과 교역함으로써 관계개선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초량왜관에서의 무역은 개항 이후 더욱 활발해져서 부산항이 물류의 중심항으로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근대화의 물꼬를 튼 역할을 하여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초량왜관의 모습?


(사진 제공 : 국립중앙박물관)


아쉽게도 현재 초량왜관의 모습은 사라져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림을 통해서만 과거 초량왜관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는데, 가장 유명한 그림은 위의 변박의 초량왜관도입니다. 장방형의 담으로 둘러싸인 지역이 초량왜관이고 중앙의 산은 용두산입니다. 초량왜관의 부지는 10만평 남짓으로 추정되는데, 1675년부터 1678년까지 3년에 걸쳐 125만 명의 인원이 투입되어 만들어졌을 만큼 그 규모가 컸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 일본과의 무역과 외교의 중심지였던 왜관! 조선시대의 왜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이제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관세청이 그 자리를 대신해 줄 것 같습니다!

 

내용 감수 : 부산세관박물관 이용득 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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