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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도(朝島)에서 있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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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 가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섬이 하나있습니다. 소위 여수8경의 하나라고 불리는 오동도란 섬인데요. 본래 이곳에는 오동나무가 많아 오동도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지금은 동백나무가 많아 일명 동백섬으로도 통하기도 하죠. 이 섬은 오래전부터 육지와 방파제로 이어져 있어 우리에게 섬 같지 않은 섬으로 다가선지 오래되었습니다.

부산에도 이와 비슷한 섬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부산항 오륙도와 마주하고 있는 섬-조도란 섬인데요. 이 섬에도 처음에는 동백나무가 많아 동백섬이라 불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치도(아침섬)로 불리다가 지금은 공식명칭이 조도(朝島)입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오륙도는 등대섬으로 낚시터로서 그리고 “돌아와요 부산항에” 때문에 부산항의 상징적인 섬으로서 인기가 높지만 이에 비하면 조도는 그렇지 못합니다. 

 

 1959년 당시의 조도 전경

 

그리고 이곳은 지난 1967년부터 육지와 방파제로 연결이 되면서 섬이란 고유한 맛이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가득이나 1974년 이곳에 한국해양대학교까지 이전이 되면서 더욱 잊어져 가는 육지와 같은 섬이 되고 말았죠. 그렇지만 조도가 한 때는 부산항 아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섬으로 이름을 떨칠 때가 있었는데, 한국전쟁이후 우리나라에서 둘도 없는 악랄한 밀수소굴로서 여론의 중심에 섰었던 것입니다. 세관 측으로 볼 때 이곳은 하루빨리 밀수를 잠재워야 하는 그야말로 머리 아픈 악명의 섬이었습니다.

대일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인 1959년도에는 대마도 이즈하라(嚴原) 항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대마도특공대밀수가 부산을 중심으로 남해안 일대에 극성을 부리고 있었는데, 당시 조도에는 90여 호에 약 55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고 그 전에는 주로 소형선박을 이용해서 인근해역에서 고기를 잡아 생활을 하는 한적한 어촌이었습니다.

이러한 섬마을이 갑자기 밀수배로부터 밀수품양륙지로 주목을 받고 긴장감이 감도는 구역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으로서 시내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데다 대마도에서 건너오는 밀수품을 양륙하기가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부산항의 외항선 묘박지(錨泊地)가 섬 인근에 있고 영도해안을 비롯한 이곳은 인적이 드물어서 밀수품을 양륙하는데 그만이었고 이러한 지역의 특수성을 밀수배가 모를 리 없었고 심지어 밀수조직 간에는 서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섬 주민을 포섭하는 등 물밑 경쟁이 뜨거웠던 것입니다.

 

10톤급 특공대밀수선

 

더욱이 주민들도 고기잡이에 종사하는 것보다는 고생을 덜하고 수입이 좋다보니 자의반 타의반으로 하나 둘씩 밀수조직에 빨려들어 가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본업을 내평개치고 주민의 약 8~90퍼센트가 밀수에 가담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기를 잡던 소형어선은 밀수품 운반선으로, 어구창고는 밀수품창고로 둔갑을 하였고, 남편이 밀수선으로부터 밀수품을 양륙하여 분산, 은닉하면 아내는 이걸 세분하여 인근 국제시장 등으로 반출하는 운반책이 주어졌습니다. 더군다나 나이 든 부모까지도 망을 보는 역할이 주어지면서 가족모두가 일사분란하게 밀수란 생업에 긴장과 흥미를 느끼며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얼마 후 조직폭력배가 이곳에 발을 뻗치게 되면서 분위기는 급변하고 말았는데, 폭력과 무장으로 주위를 제압한 이들은 대부분의 집에 지하비밀창고를 설치하는 등 섬전체가 흉악한 밀수소굴로 변해갔습니다. 특히 이들 조직은 밀수품을 양륙하기 위해서는 영도 산정(山頂)에서 4~5명이 한 조가 되어 세관감시선과 수사요원들의 활동상황을 체크하였습니다. 마치 항공기 관제탑과 같은 비밀초소를 운영하면서 여기서 얻은 정보를 밀수선에 연락을 하여 밀수품이 안전하게 양륙이 되도록 입체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들은 주로 낮에는 손거울을 이용하여 햇빛을 반사시켜 신호를 보내기도 하고 야간에는 손전등으로 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한국해양대컴퍼스가 자리한 지금의 조도

 

더욱이 섬 주민들마저도 밀수조직원의 지시를 잘 따르는 바람에 좀처럼 정보꺼리가 나오지 않아 세관을 비롯한 관계기관에서는 첩보수집 활동에 무척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밀수소굴도 영원한 철옹성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듯 1960년 2월 2일, 이곳에 세관초소를 설치하는 등 강력한 밀수단속을 펼치게 된 것이죠. 그러자 밀수조직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서서히 허물어져 갔고 밀수근절이라는 무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이들과 싸운 세관원들의 쾌거였습니다. 그렇지만 무심한 세월은 이러한 사실을 역사의 뒤안길에 묻어두고 잊어진지 오래입니다. 지금 조도는 뜨겁습니다. 이곳은 우리나라 미래의 해양일꾼을 가꾸는 산실로서 젊은이들의 열기가 대단하기 때문이죠.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실감나는 현장이 바로 조도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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