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네이버 블로그로 이전했습니다.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2782

[이용득의 관문백물] 토종브랜드 ‘넘버 1’

$
0
0

 

흔히 인삼'조선시대의 반도체'라고 부르는데, 그 당시 수출효자 상품으로서 백성을 먹여 살리는 데는 인삼만한 대표적 특산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고려인삼은 국내외에서 여전히 경쟁력을 갖춘 브랜드 상품으로 인기가 높은데, 지난해 인삼 및 인삼제품의 수출액이 자그마치 1억8900만달러로 사상 최고액에 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삼은 우리의 고유한 토종 브랜드로서 가치와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오래전부터 중국과 일본의 진상품이자 답례품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특히 사행길의 역관이나 교역을 하는 무역상들이 즐겨 가지고 나가던 품목으로,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중반까지 약 100년에 걸쳐 조선은 가장 화려한 무역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언제나 조선인삼은 황금꽃으로 피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이러한 조선인삼에 대해 시샘이 많은 나라가 일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쓰시마 상인들은 달랐는데, 이들은 조선의 인삼을 통해 재미를 보는 집단으로서 일본 본토 에도 등지에 인삼좌(人蔘座)라는 판매점을 열어서 이익 챙기기에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 은이 대량으로 조선으로 유출되는 원인이 되다 보니 마침내 일본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1721년 쓰시마 도주(島主)에게 조선의 인삼 생초를 반출해 오도록 명령을 내리고 그해 10월부터 약 7년에 걸쳐 왜관을 통해 반출된 인삼모종과 씨앗은 일본 각지에 심어져 시험재배에 들어가고 결국 인삼 국산화에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저렴한 미국산 인삼까지 수입해 유통시킴으로써 날로 조선인삼의 판로는 막히게 되고 끝내 초량왜관의 중개무역 또한 쇠퇴의 길로 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지금의 부산시 용두산 부근에 존재했던 변박의 초량왜관도.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이러한 침체된 무역을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상품이 개발된 것이홍삼이었습니다. 1797년(정조 21년) 처음으로 120근이 중국과 공식무역을 한 이후로 홍삼무역량은 급증했는데, 특히 1840년대에 이르러서는 아편에 중독된 중국인에게 해독을 시키는 데 특효약으로 홍삼이 알려지면서 홍삼 수출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 최고의 거상 임상옥은 바로 홍삼의 등장과 함께 만상(灣商:의주상인)으로 인삼무역상으로 활동하게 된다는 점. 시대의 영웅은 난세를 타고 나지만 거상 임상옥은 홍삼을 타고 났다고나 할까. 그는 두둑한 배짱과 사람을 제대로 보는 판단력으로 조선의 인삼무역권을 독점하고 많은 돈을 벌어 어려운 일을 돕는 데 앞장서기도 해 곽산군수와 같은 관직에 발탁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세계 인삼시장 규모는 연간 약 30억달러로 고려인삼과 미국삼이 양대 산맥을 이루고, 이 중에 약 80%는 미국삼이 차지하며 대부분이 아시아 지역에서 팔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성과 효능만 보더라도 감히 수만년 전부터 우리나라 심산유곡에서 자연의 기운을 받으며 자란 우리의 브랜드 고려인삼에 비할 바가 안되겠죠~ ^^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2782

Trending Articles